얼음왕관
실바나스 윈드러너가 평안의 바다 위에 떠 있다. 순수한 감정이 육체적 감각을 대신한다. 행복이 손에 잡힐 듯 아련하다. 기쁨이 보이고, 평화가 들린다. 이곳은 사후 세계, 그녀의 운명이다. 실버문을 지키다가 쓰러진 그녀가 도착한 영원의 바다, 바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다. 하지만 이곳을 회상할 때마다 기억에 먹구름이 낀다. 소리가 멀어지고, 온기는 식어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반쯤 잊은 꿈처럼 파리하게 바랜다. 그래도 기억의 끝은 언제나 끔찍하리만큼 선명하다. 실바나스의 영혼이 뜯겨 나간다. 너무나도 강렬한 고통에 그녀의 영혼에 영영 찢긴 상처가 남는다. 아서스 메네실의 비웃음, 그 뒤틀린 웃음과 생명 없는 눈동자가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오며 조롱한다. 그녀를 타락시킨다. 아서스의 공허한 웃음소리, 그 기억이 실바나스를 소름 끼치게 한다!
"개 같은 놈!" 실바나스가 울부짖으며 리치 왕의 얼어붙은 갑옷 조각을 걷어찼다. 공허에 가득 찬 그녀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는 극도로 고조된 증오로 갈라졌다. 그 소리는 온 얼음왕관 꼭대기에 메아리치며, 이 끔찍한 장소를 공포로 가득 채운 안개처럼 계곡 여기저기에 퍼졌다.
여기, 아서스의 옛 권좌에 그녀는 홀로 찾아왔다. 얼음왕관 성채의 최정상, 얼어붙은 왕좌가 하얀 얼음의 평원 위에 도사린 곳. 그래, 그 자만심 가득했던 애송이는 세상을 지배하기라도 하는 양 여기 앉아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 있나?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의식 끄트머리를 잡아당기던 아서스의 악의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부서진 갑옷은 하얀 봉우리 꼭대기의 옛 왕좌 앞에 조각나 흩어져 있다. 이를 둘러싼 것은 켜켜이 쌓여 검게 변한 선혈, 바로 아서스를 무릎 꿇게 한 용사들이 흘린 피였다.
실바나스는 아서스가 쓰러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녀는 한때 서리한을 움켜쥐었던, 이제는 조각난 건틀릿을 집어들었다. 아서스가 마침내 죽었다. 하지만 가슴 속은 왜 이리도 공허한가? 왜 몸은 아직도 분노로 떨리는가? 그녀는 손에 든 방어구를 봉우리 밖으로 던져 소용돌이치는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화질 파일 다운로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아홉 영혼이 첨탑을 둘러싸고, 가면 쓴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흐릿한 형체는 우아하고 실체 없는 날개를 펄럭이며 떠 있었다. 그들은 발키르, 한때 아서스의 의지에 묶여 노예가 되었던 고대 여전사였다.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지? 실바나스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실바나스가 분노를 터뜨릴 때에도 그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고, 침묵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가늠하려는 것일까? 실바나스는 발키르를 무시한 채 눈밭 위를 걸어 아서스의 권좌로 다가갔다.
누군가 왕좌에 앉아 있었다.
실바나스는 처음에 누군가 아서스를 조롱하기 위해 왕좌에 그의 시체를 앉혀놓고 얼음덩이로 봉인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상이 전혀 달랐다. 그녀는 왕좌에 다가가 얼음 표면을 손으로 문질러 그 안의 뒤틀린 형체를 들여다봤다. 인간이었다. 얼라이언스의 어깨 갑옷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육체가 심한 화상을 입은 채였고, 피부는 구운 고기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는 아서스의 왕관을 쓰고, 점멸하는 의식이 비치던 아서스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아서스를 대신할 자가 남아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자는 새로운 리치왕이었다!
실바나스는 또 한 번 울부짖었다. 충격은 폭발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얼음을 내리치고, 다시 주먹으로 때렸다. 얼음이 갈라졌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얼음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울부짖음은 점차 잦아들어, 성채 꼭대기를 둘러싼 안갯속으로 공허하게 사라졌다. 놈을 대신할 자가 남아 있었다. 리치 왕은 영원히 존재할 거란 뜻인가? 순진하기도 하지... 멍청이들. 이 꼭두각시 왕은 언젠가 세상을 제멋대로 비틀어 놓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끔찍한 존재가 휘두르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쓰디쓴 충격이었다. 그녀는 승리자로서 이곳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 또 한 번의 패배를 맛볼 줄은 몰랐다. 승리는 공허했다. 그녀는 왕좌로부터 뒷걸음치며, 어깨를 펴고 순환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서스는 죽었다. 다른 시체 하나가 텅 빈 왕좌를 채운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실바나스 윈드러너는 복수를 끝마쳤다. 실바나스와 그녀의 백성을 수년 동안이나 이끌어온 목표는 이루어졌다. 생명을 잃어버린,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의 육신은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그녀는 한편으로 언제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잡아끌던 아서스가 없음에도 자신의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왕좌에서 물러나 천천히 주위의 차가운 회색빛 세상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극한 행복의 장소, 반쯤 잊어버린 예전 세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고향.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천천히, 그녀는 얼어붙은 산 정상의 삐죽삐죽한 가장자리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아래 까마득한 곳에는 앞서 보았던 사로나이트 가시가 구름에 둘러싸인 채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냥 떨어진다고 해도 죽지는 않으리라. 되살아난 그녀의 육신은 거의 파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저 가시들, 고대 신의 피가 딱딱하게 굳어 생긴 가시라면 그녀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갈가리 찢어 놓으리라. 그녀는 그런 최후를 갈망했다. 평화로의 귀환. 실버문 숲에서 시작된 그녀의 복수가 마침내 아서스의 죽음과 함께 종지부를 찍을 순간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메었던 활을 벗어 옆으로 던져버렸다. 울퉁불퉁한 얼음 바닥에 떨어진 활은 쨍강 소리를 냈다. 그리곤 화살통을 풀었다. 쏟아져 내린 화살은 얼음왕관 성채의 측면을 타고 떨어져 하나씩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텅 빈 화살통이 그녀의 발치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무기를 벗어버리자 실바나스의 낡은 검은색 망토가 풀어졌고, 망토는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그녀의 목 주위를 채찍질하듯 펄럭였다. 그녀는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먹먹한 아픔뿐이었다. 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리라. 그녀는 십여 년 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낭떠러지의 가장자리 너머로 체중을 맡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발키르들은 마치 하나처럼 그녀를 향해 조용히 돌아섰다.

